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 (문단 편집) == 평가 == 과거에는 동양의 [[요순시대]] 정도로 극찬을 받았던 세습왕조였다. 특히 오현제(五賢帝)로 불리는 다섯 현제가 제국의 평화를 가져다 주고, 끝없는 복리증진 및 시혜책으로 명망을 얻은 부분은 왕조의 말년이 최악의 폭군 콤모두스로 인해 상처를 입었어도 극찬을 받았다. 한 문장으로 정리해보자면, 로마인들 기준으로는 분명 '''여러모로 황금 시대(Saeculum Aureum)라는 표현이 걸맞았던 시기'''가 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가 존속한 시대였다. 하지만 후기 프린키파투스의 등장과 [[세베루스 왕조]], 3세기 황제들의 노력 등이 연구되고, 이 시기의 유물, 유적 발견과 비문 해석 등으로 인해 현대에는 과거 에드워드 기번의 예처럼 마냥 완벽한 세습 왕조로 찬사를 받지 않는다. 되려 그 평가는 3세기의 점증된 위기를 초래했고, 오현제 중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외엔 기존 문제를 심화시키거나, 위기 확대 와중에 잘못된 판단 속에서 로마 제국의 부정적 영향을 장기화시켰다고 재평가받고 있다. 따라서 현대학자들은 "순금이 아닌 도금된 평화기였다"고 평하면서, "굳이 다섯 황제 모두를 현제로 묶어야 되느냐"고 평가하기도 한다. 고대부터 당대 로마인들에게 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와 안토니누스 가문이 극찬을 받은 이유는 간단했다. 바로 안정기에 접어든 프린키파투스(원수정) 아래에서 황제와 원로원이 큰 감정다툼 없이 공존했고, 해당 왕조가 2세기를 대표한 최고 명망가로 군림했기 때문이다. 정치적으로는 황제와 [[원로원]]과의 관계가 전반적으로 양호했다.[* 양호해야지 좋은 황제로 칭송된다. 명군이거나 어느 정도 업적이 있었음에도 원로원과 대립각을 너무 세워서 폭군 취급받는 황제도 많았다. 대표적인 케이스가 티베리우스였다.] 이런 상황의 배경에는 우선 왕조의 설립자인 [[네르바]] 본인이 원로원의 승인에 의하여 정통성을 확고히 했다는 점을 들 수 있으며, 또한 황제들이 전반적으로 원로원의 비위를 적당히 맞춰주었던 점도 컸다. 다만 유일한 예외인 하드리아누스의 경우 즉위 직후 원로원의 요인 4명을 반란 혐의로 재판도 없이 즉결처형 해버린 데다가, 재위 기간 내내 속주 순방에만 열심인 채 본진인 로마는 비워둬서 원로원과 사이가 개판이었다. 하지만 정작 실제적 권력의 측면으로 보자면 원로원의 기능 쇠퇴가 가속화된 시기이기도 한데, 이 시기 원로원은 더이상 주요한 인적 풀의 역할을 담당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대신에 황제들은 측근 관료층이라고 부를 만한 세력을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당장 로마 역사상 최고의 역사가이자 지식인으로 원로원 의원이었던 [[타키투스]]가 공직상으로는 별다르게 한 것이 없다는 것을 생각해보자. 하지만 이들 [[기사계급]]도 능력이 출중하거나 황제에게 잘보여서 황제 관료로 생활한 후 황제의 추천으로 원로원 의석을 얻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원로원 계급으로 들어갔다. [* 2세기쯤 되면 공화정 시기부터의 명문 귀족은 많이 남지 않았고, 다수의 원로원 의원들의 가계도를 올라가면 [[기사계급]] 출신이 많았다.] 군사적으로도 제국은 역사상 최대의 판도로 영토를 확보하여 안정기를 맞았다. [[트라야누스]] 황제 시기에는 [[다키아]]를 정복하여 [[도미티아누스]] 황제 시절의 참패를 앙갚음했고, [[파르티아]] 원정까지 감행해 수도 크테시폰을 함락해버리기까지 했다.[* 여담이지만, 파르티아의 수도를 함락한 후 트라야누스가 한 말은 '''"[[알렉산더 대왕|내가 젊었으면 인도까지 갈 텐데..]]"'''였다고 한다. ] 트라야누스가 파르티아 원정 와중에 사망한 후 그를 계승한 [[하드리아누스]] 황제는 '더이상의 영토 확장은 제국의 역량을 감안할 때 무리수이다.'라는 판단을 내리고 파르티아에서 군사를 철수하였으며[* ~~시오노 나나미 시각이고, 그의 정확한 의도는 알 수 없다.~~시오노 나나미가 까일 부분이 많은 건 맞지만 이건 로마 사학자들의 전반적인 시각이다.]이후로 로마는 팽창 정책보다는 철저히 국경 수성에 몰두하게 된다.[* 원수정 시기에 제국확장을 포기한 적이 없다. 애초에 라인•도나우 강도 국경선이 아니었고 강을 따라 방어하지도 않았다. 로마군의 요새는 강 너머 깊숙이까지 있었고 주둔한 흔적도 꾸준히 발견된다. 하드리아누스는 그런 요새들을 강화한 것뿐이었으며, 이후 로마는 능력만 되면 확장하려고 했다. 상황과 관리 역량이 부족했을 뿐.] [* 다만 하드리아누스의 뒤를 이은 [[안토니누스 피우스]]의 경우 '너무 국경 자체를 지키는 것에만 몰두하다가 국경 밖 게르만족의 세력 구도가 대격변을 일으키는 것을 놓쳤고, 이로 인해 후임인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그 똥을 치워야만 했다.'라는 비판을 사기도 한다. 이에 대한 갑론을박은 안토니누스 피우스 항목 참조.] 정확히 말하자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재임 기간 내내 게르만족의 외침에 시달린 나머지, 재임 말기에 [[게르마니아]] 일대를 정복하고 속주화하려는 전쟁을 벌이기도 했지만 전쟁 도중에 아우렐리우스가 병사하고 후임 콤모두스가 전쟁을 중간에 포기해버리면서 무산되었다. 근데 아이러니하게도 후대의 역사학자들은 "콤모두스가 전쟁을 포기한 동기는 아마 그냥 막사 생활이 지겨워서(...)였겠지만 그 당시 로마의 재정 상황이나 여러 상황을 감안했을 때 현명한 결정이었다"고 평가하고 있다. 이러한 정치, 군사적 안전성을 바탕으로 제국 각지에서 활발한 물자 교류가 이루어지면서 경제력의 절정을 맞이함과 동시에 지나친 식민도시 개발 및 농작지 확대로 인해서 서서히 경제적인 엔트로피의 고갈이 이루어지던 시기도 이 시기였다. 그렇지만 여러 연구들에서 밝혀졌듯, 이 왕조 아래에서 로마 제국은 종국적으로 '3세기의 위기'라는 수렁에 빠지게 됐다. 이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아들 콤모두스만의 잘못 때문이 아니다. 오현제로 불리는 황제들의 지나친 확장정책, 순방을 벌이며 진행된 무리한 황제 중심의 세계주의화, 방치되기 시작한 본국 이탈리아와 서방 속주들의 경제적 침체 및 쇠퇴 등으로 그 속은 곪아 있었다. 이전 황제들과 달리 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 황제들은 재정적, 경제적 취약성을 고민한 황제는 안토니누스 피우스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외엔 없었고, 이들마저 제국이 경제적 잠재력을 마음껏 발산하도록 환경을 조성하지 못한 처지에 놓여 있었다. 일례로, 로마 제국의 경제 지표에서 가장 중요한 지역인 이탈리아에서 황제가 기금을 풀어 중위소득 수준을 안정화시키는 알리멘타 기금 증가 필요성이 늘고, 동방에서 파산한 도시들이 속출한 시기는 공교롭게도 오현제의 절정이라고 불린 트라야누스 치세 후반부터였다. 인재풀 역시 하드리아누스 시대부터 증가한 문민화, 귀족화된 세습 귀족들의 증가 속에서 제국이 필요로 한 군필 원로원 의원, 기사계급의 감소가 가속화된 것도 이 왕조 아래에서부터였다. 로마 제국의 프린키파투스가 문제가 많음에도 황금기로 찬사하는 이들의 평가가 무색하게도, 공화정체 위에 올라탄 제정의 한계가 고질적인 문제로 확산되고 로마 원로원이 황제 입만 바라볼 정도로 무능함을 노출해 황제가 자문회의, 특별위원회를 상설화하고 프라이토리아니를 중앙 내각기구로 활용하려는 시도가 보인 시절도 이 왕조 아래에서부터였다. 괜히 여러 학자들이 입을 모아 "황금 시대가 아니라 도금 시대"로 평하는게 아니다. 따라서 안토니누스 피우스가 과거처럼 평화기에 몸을 맡기고 흐르는 물처럼 통치했다는 주장 역시 기존 통설과 달리 트라야누스, 하드리아누스 대에 진행된 문제 해결 때문이라는 평을 받고 있다. 또 트라야누스의 연이은 팽창전쟁과 하드리아누스의 내정개혁 및 순방 역시 "전쟁 승리와 막대한 전리품에 가려진 도금된 업적", "이전 두 세습 왕조 시대때 얻은 누적된 성과를 과실삼아 개인적 야심으로 진행된 무리한 전쟁", "효율을 가장한 문제많은 개혁","왜 안토니누스 피우스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그 시대 이전 정책들로 회귀했는지 납득이 간다" 등의 부정적 평도 많이 나오고 있다. 그래서 현대에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루키우스 베루스 공동통치와 함께 시작된 연이은 위기의 시작은 이미 건강위협 신호가 중병 수준으로 닥친 상황과 비슷하다는 평도 받고 있고, 과거 찬사받던 업적들 역시 이전의 플라비우스 왕조와 이후의 세베루스 왕조들의 성과로 재평가받고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